보스토크 (우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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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토크는 소련의 최초 유인 우주선으로, 정찰 위성 및 유인 우주 비행을 위해 개발되었다. 구형의 하강 모듈과 원뿔형 계기 모듈로 구성되었으며, 재진입 시 우주비행사는 사출되어 낙하산을 통해 착륙했다. 보스토크 우주선은 여러 모델로 개발되었으며,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사용된 보스토크 3KA는 유리 가가린을 태우고 지구 궤도를 비행했다. 보스토크 계획은 소련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보다 앞서 나가는 데 기여했으며, 이후 보스토크 2호, 3호, 4호, 5호, 6호가 잇따라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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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우주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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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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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사 | OKB-1 |
설계자 | 세르게이 코롤료프 |
국가 | 소비에트 연방 |
운용 주체 | OKB-1 |
용도 | 단일 조종사 지구 궤도 비행 |
승무원 | 1명 |
직경 | 2.43 m |
길이 | 4.55 m |
궤도 | 저궤도 |
상태 | 퇴역 |
발사 횟수 | 13회 |
성공 횟수 | 9회 |
실패 횟수 | 2회 |
손실 횟수 | 2회 |
최초 발사 | 1960년 5월 15일 (Korabl-Sputnik 1) |
마지막 발사 | 1963년 6월 16일 (Vostok 6) |
파생형 | 포톤 보스호트 제니트 바이온 |
다음 우주선 | 보스호트 |
상세 정보 | |
설계 수명 | 알 수 없음 |
발사 질량 | 알 수 없음 |
건조 질량 | 알 수 없음 |
탑재 용량 | 알 수 없음 |
부피 | 알 수 없음 |
전력 | 알 수 없음 |
배터리 | 알 수 없음 |
장비 | 알 수 없음 |
구성 요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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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발
보스토크 우주선은 소련의 첫 정찰 위성 프로그램용 카메라 플랫폼[1] 및 유인 우주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계되었다.[2] 이중 사용 설계는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얻는 데 매우 중요했다. 기본 보스토크 설계는 약 40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무인 위성에 맞게 점진적으로 개조되었다. 강하 모듈 설계는 보스호트 계획에 의해 강하게 수정된 형태로 재사용되었다.
2. 1. 설계
보스토크 우주선은 원래 카메라 플랫폼(소련의 첫 번째 정찰 위성 프로그램용)[1] 및 유인 우주선으로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2] 이러한 이중 사용 설계는 프로그램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얻는 데 매우 중요했다. 기본 보스토크 설계는 약 40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무인 위성에 맞게 점진적으로 개조되었다. 강하게 수정된 형태로 강하 모듈 설계는 보스호트 계획에 의해 재사용되었다.우주선은 우주비행사, 계기 및 탈출 시스템을 수용하는 구형 하강 모듈(질량 2.46ton, 지름 2.3m)과 추진제와 엔진 시스템을 포함하는 원뿔형 계기 모듈(질량 2.27ton, 길이 2.25m, 너비 2.43m)로 구성되었다. 재진입 시 우주비행사는 약 7000m에서 우주선에서 사출되어 낙하산을 통해 하강하고, 캡슐은 별도로 착륙했다. 그 이유는 보스토크 하강 모듈의 착륙이 매우 거칠어서 우주비행사가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출 좌석은 또한 우주 프로그램 초창기에 흔히 발생했던 발사체 고장 시 탈출 메커니즘 역할을 했다. 발사 후 처음 40초 동안 사고가 발생하면 우주비행사는 우주선에서 사출되어 낙하산을 타고 지구로 내려왔다. 발사 후 40초에서 150초 사이에는 지상 관제사가 부스터에 수동 중단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발사체가 충분히 낮은 고도로 떨어지면 우주비행사가 사출되었다. 덮개 제거 이후 고고도 고장의 경우 부스터에서 우주선 전체를 분리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한 가지 문제는 사출 좌석이 낙하산을 펼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발사 후 처음 20초 동안의 발사체 고장 상황이었다.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의 LC-1에는 우주비행사가 발사대에서 사출될 경우 하강 모듈을 잡기 위해 그물망이 설치되었지만, 폭발하는 부스터에 너무 가까이 착륙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 효용성은 의심스러웠다. 발사 초기 몇 초 동안의 사고는 또한 우주비행사가 생존 가능한 사출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높았고, 아마도 이 상황은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2001년 V.V. 몰로드소프의 회고에 따르면, 수석 설계자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발사 초기 몇 초 동안 보스토크의 승무원 탈출을 위한 부적절한 대비에 대해 "정말 끔찍하게" 느꼈다고 한다.
유인 버전까지 보스토크에는 여러 모델이 있었다.
2. 2. 모델
보스토크 우주선은 원래 카메라 플랫폼(소련의 첫 정찰 위성 프로그램용)[1] 및 유인 우주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계되었다.[2] 이러한 이중 사용 설계는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얻는 데 매우 중요했다. 기본 보스토크 설계는 약 40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무인 위성에 맞게 점진적으로 개조되었다. 강하게 수정된 형태의 강하 모듈 설계는 보스호트 계획에 의해 재사용되었다.유인 버전까지 보스토크에는 여러 모델이 있었다.
- '''프로토타입 우주선''': 코라블-스푸트니크 2 미션에 사용되었으며, 이 미션에서 최초의 동물들이 궤도에서 회수되었다.
- '''사진 정찰 및 신호 정보 수집 우주선''': 이후 제니트 정찰 위성으로 명명되었다.
- '''보스토크 3KA''':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에 사용된 우주선이다. 보스토크 8K72K 발사체를 사용하여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발사되었다. 1961년 3월 9일에 첫 비행을 했고, 유리 가가린을 태운 보스토크 1호는 1961년 4월 12일에 발사되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를 태운 보스토크 6호는 1963년 6월 16일에 발사되었다. 총 8대의 보스토크 3KA 우주선이 비행했으며, 이 중 6대가 유인 비행이었다.
보스토크 3KA의 세부 사양은 다음과 같다.
재진입 모듈 (보스토크 SA) | 장비 모듈 (보스토크 P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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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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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토크 캡슐은 제한적인 추력 제어 능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엔진 시스템과 분리된 후에는 재진입 경로와 방향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는 캡슐이 모든 면에서 재진입 열로부터 보호되어야 함을 의미했고, 이에 따라 구형 설계를 채택했다. 이는 열 차폐막의 직경을 최소화하면서 최대 부피를 허용했던 머큐리 계획의 원추형 설계와는 대조적이다. 캡슐 재진입 방향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어는 무거운 장비를 배치하여 차량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킴으로써 가능했으며, 이는 또한 우주 비행사가 수평 자세에서 중력 가속도를 견딜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 비행사는 8~9g의 중력을 경험했다.
보스토크 우주선은 원래 카메라 플랫폼(소련의 첫 번째 정찰 위성 프로그램용)[1] 및 유인 우주선으로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2] 이러한 이중 사용 설계는 프로그램에 대한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얻는 데 매우 중요했다. 기본 보스토크 설계는 약 40년 동안 사용되었으며, 다양한 무인 위성에 맞게 점진적으로 개조되었다. 강하게 수정된 형태의 강하 모듈 설계는 보스호트 계획에 의해 재사용되었다.
3. 재진입
만약 역추진 로켓이 고장났다면, 우주선은 10일 이내에 자연적으로 궤도에서 이탈했을 것이며, 우주 비행사에게는 그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 충분한 식량과 산소가 제공되었다.[1]
4. 보스토크 계획
보스토크 계획은 1960년 9월 18일 스푸트니크 5호의 성공에 힘입어 시작되었다. 스푸트니크 5호는 벨카와 스트렐카 두 마리의 개를 비롯한 다양한 생물을 태워 무사히 귀환하였다. 같은 해 9월 "올해 12월까지 인간을 우주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는 애초에 무리한 계획이었다. 10월에는 R-16 미사일 시험기가 연료 계통의 오류로 지상에서 폭발하여 작업원, 기술자, 연구자 91명이 사망하는 니제린 참사가 발생했다. 이는 보스토크 계획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계획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나 약간의 지연이 발생했지만 계획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1961년 3월 9일에는 키 175cm, 몸무게 65kg의 정교한 인형 "이반 이바노비치"가 발사되어 무사히 귀환했다. 이 신체 크기는 최초의 우주 비행사와 거의 같았다. 이반은 같은 달 25일에 다시 발사되었고, 역시 무사히 귀환했다. 하지만 첫 번째 이반이 귀환했을 때, 근처 농부가 이 인형을 기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보드카를 마시게 하려다 얼굴에 "모형"이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보스토크 1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
4. 1. 보스토크 1호
보스토크 1호는 1961년 4월 12일 오전 9시 7분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 유리 가가린 소령을 태우고 발사되었다. 보스토크 1호는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오전 10시 25분에 역분사를 한 후, 대기권에 재진입하였다. 고도 7000m에서 가가린은 좌석과 함께 캡슐에서 사출되어 낙하산을 통해 무사히 귀환했다. 발사부터 귀환까지는 108분이 걸렸다. 보스토크 1호의 준비는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성공 후 인류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으로 공표되어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가가린은 귀환 후 기자 회견에서 "지구는 푸르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 뒤에 '그러나 신은 없었다'라는 구절이 덧붙여지는 경우가 있지만, 일화로서 다른 기회에 말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4. 2. 2호 이후
게르만 티토프를 태운 보스토크 2호는 1961년 8월 6일 발사되어 25시간 동안 우주에 머물렀다. 티토프는 지구와 우주 공간을 촬영하고 무중력 상태에서 실험을 했다. 1962년 8월 11일과 12일에는 보스토크 3호와 보스토크 4호가 연속 발사되어 랑데부 테스트를 실시, 5km까지 접근했다. 보스토크 5호와 보스토크 6호도 랑데부 테스트를 하여 4km까지 접근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탑승한 보스토크 6호(콜사인 "차이카")는 여성 최초의 우주 비행이었다. 테레시코바는 궤도에서 "야 차이카"(나는 갈매기)라고 송신하여 유행어가 되었다. 이후 소련의 유인 우주 비행은 2인승 보스호트로 이어졌다.
5. 미국의 대응
스푸트니크 1호 발사로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에서 뒤처진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머큐리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유인 우주 비행이 실현된 것은 보스토크 1호보다 1개월 늦은 1961년 5월 5일로, 이날 앨런 셰퍼드가 탑승한 프리덤 7은 탄도 비행을 했다. 비행 시간은 약 16분이었다.
6. 계획 개요
(지구 궤도)
(1바퀴)
(17바퀴)
(64바퀴)
(48바퀴)
(82바퀴)
(48바퀴)